이 글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약 20여년 가까운 역사와 기타 풍문등 잡다한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나름 필자는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두 회사 중 한 회사에서 일해보기도 했고, 그래서, 주변 지인들이 이 두 회사에 다녔거나 다니고 있기도 하고, 전후에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반도체 회사? 근데 둘이 전혀 다른 회사예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둘 다 반도체 회사라고 부르지만 사실 성격이 꽤 다릅니다.
삼성전자의 사업부를 보면 반도체(DS), 가전·모바일(DX), 디스플레이(SDC) 등으로 구성돼 있어요. 반도체도 만들고, TV·스마트폰 같은 완성품도 만드는 거죠.
반면 SK하이닉스는 반도체 메모리, 즉 DRAM과 NAND 플래시만 만듭니다. 완성품은 없어요.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삼성전자는 자동차도 만들고 엔진도 만드는 회사, SK하이닉스는 엔진만 만드는 회사라고 보시면 딱 맞습니다.

 

 

 

 

삼성전자의 간단한 역사

지금은 반도체 하면 삼성이지만, 사실 삼성전자의 출발은 TV 제조사였어요. 1969년 창업해서 1970년대에 흑백 TV로 큰 성공을 거뒀고, 이후에도 TV 분야에서 꽤 오랫동안 세계 시장 점유율을 탄탄하게 유지했습니다.


반도체의 시작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반도체를 이병철 회장이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첫 발을 내딛었어요.

이후 1983년에 본격적인 반도체 투자 선언("도쿄 선언")을 하고, 1980~90년대 내내 "세계 최초" 타이틀을 달고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해 나갑니다. (아래 그림 참고)

 

출처: 나무 위키

 

한번은 하이닉스 다니던 선배님이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지는 한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기술로 따졌을 때, 하이닉스가 삼성전자에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고요. 다만,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내세워서 뭔가 개발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하이닉스(구. 현대반도체, LG반도체) 가 딱 2~3개월 정도 밀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이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파업기간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 한국에서 1980년대 말 즈음에는 임금인상을 이유로 파업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게다가 현대 계열은 노조가 강성이기도 했구요.

 

 

하이닉스의 간단한 역사

SK하이닉스는 1983년 현대전자산업으로 출발했습니다. 이후 1999년 정부 주도의 "빅딜"을 통해 LG반도체를 합병하면서 단숨에 세계 2위 DRAM 제조사로 올라섰어요.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합병 후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다가 2001년 현대그룹에서 분리됐고, 오랜 채권단 관리 체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현대"라는 이름이 오히려 기업 이미지에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 하에 하이닉스반도체로 사명을 바꿨죠.
한 때, 주가가 한 주에 100원대까지 떨어지면서 상장 폐지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왔습니다.

 

 

반도체 업계의 간단한 역사와 치킨 게임

아래 그림은 Gemini 가 그려준 시대별 DRAM 반도체 시장점유율입니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엇비슷해 보입니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DRAM 생산업체가 전세계에 20개가 넘게 있었습니다. 

대충 1998년 IMF 무렵 전후해서 그 수가 절반 정도로 줄었고, 그 다음 2008년 리만 브라더스 사태 전후로 다시 절반정도로 줄어듭니다.

2010년대 기준으로 보면, DRAM 반도체 시장은 독과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무렵부터 삼성과 하이닉스 가 전체 시장점유율의 70% 정도 혹은 그 이상을 가져갑니다.

 

 

위 그림처럼 독과점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치킨 게임> 입니다.

본래 <치킨 게임> 은 두 사람이 절벽을 향해 차를 몰고 가다가 먼저 뛰어내리는 사람이 겁쟁이가 되는 게임입니다. 

아래 동영상 - 이유없는 반항, 제임스 딘, 1955 - 이 <치킨 게임> 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GtEp7zFdrc

 

 

반도체 업계에서 치킨 게임이란, 공급이 넘쳐서 가격이 폭락해도 생산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 쏟아내는 전략을 말합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생산을 하게 되면 결국 회사가 망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위 영화에서 자신이 죽을수도 있는데 끝까지 핸들을 돌리지 않는 등장인물들과 닮아있습니다.

 

한 편으로 생산을 줄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반도체 생산 공정을 멈추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 이런 산업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더라도 생산 라인을 계속 돌려야 합니다.
- 대표적인 곳이 제철소인데, 용광로가 꺼져버리면 다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제품이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 용광로의 온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미친 짓을 지난 수 십년 동안 몇 번을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회사들은 독과점이 되어 꿀을 빨게 됩니다.

실제로 하이닉스의 경우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 위에서 한 번 언급했지만, 동전주(동전으로 살 수 있는 주식)가 되기도 - 했습니다.

 

요즘 SK 의 하이닉스 인수를 대단한 결정이라고 얘기하는 친구들이 있던데, SK 의 하이닉스 인수는 이 업계에서는 이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평정한 상태였고, 독과점 회사 중 하나를 인수한 것 뿐이라고 봅니다. SK 는 항상 이런 회사들을 인수해왔습니다. 첫 번째가 대한석유공사(보통 "유공"이라고 부름, 현 SK 이노베이션) 이었고, 두 번째가 한국이동통신(현 SK 텔레콤) 이었습니다. 둘 다 독과점 시장의 정부 공기업을 잘 인수(? - 심지어, 대통령 딸과 결혼해서) 한 사례입니다. 차이는 이 두 가지 사례는 국내 독과점 기업을 정부로 부터 인수한 것인데 반해, 하이닉스의 경우,  전세계를 상대로 한 독과점 기업을 채권단으로 부터 인수한 것입니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IMF, 리만 사태때 반즈음 죽어버릴 뻔한 회사를 임직원들이 절치부심해서 겨우 살려 놓았더니, SK는 인수해서 꿀만 빤 셈입니다.

 

 

오너 경영이 좋을까, 전문경영인이 좋을까

이 두 회사의 역사에서 오너 경영 논쟁의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나옵니다.


2007~2008년,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 사건으로 한바탕 시끄러웠습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불거진 이 사건은 특별검사 수사로 이어졌고, 1,200여 개 차명계좌에 4조 5,000억 원 규모의 차명재산이 드러났습니다. 

이 회장은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문제는 이 시기가 공교롭게도 반도체 치킨 게임의 한복판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너 부재 상황에서 삼성전자 경영진은 신규 반도체 라인 투자를 보류합니다.

수익이 악화된 상황에서 당시 매출(30~40조 원 규모) 대비 상당한 규모의 투자 결정을 오너 없이 내리기 어렵다는 이유였죠.

 

이에 반해, 채권단의 감시 아래 전문경영인이 경영하던 하이닉스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합니다.

Google Gemini 는 이 때 유상증자를 이렇게 평가하네요.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는 2000년대 후반, 특히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극심한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두 차례 대규모 유상증자(1월, 5월)를 단행했습니다. 당시 약 1조 원 이상의 자금을 확보하여 부도 위기를 넘겼으며, 이 유상증자는 2009년 당시 큰 주목을 받은 대규모 조달 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009년 하이닉스 유상증자 

주요 내용배경 : 2000년대 후반 반도체 불황과 금융위기, 경영난 심화로 인한 생존 위기.

- 1차 증자 (2009년 1월): 약 3,240억 원 규모.
- 2차 증자 (2009년 5월): 약 7,000억 원~7,245억 원 규모 (주당 발행가 1만 350원).

결과 : 대규모 자금 확보로 2000년대 위기를 극복하고, 이후 SK그룹 인수 등으로 이어지는 기반을 마련.
당시 유상증자는 주가 폭락 상황에서 진행되었으나, 이후 주가 회복과 성공적인 인수로 인해 역사적인 '동전주' 탈출과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이후 법적 리스크가 해소되자 경영에 복귀하면서 기존 투자 계획을 두 배로 늘려 공장을 증설했습니다.

결단력 있는 오너 경영의 좋은 사례라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오너 리스크 때문에 결정이 늦어진 측면도 있죠.
하이닉스 사례를 보면 굳이 오너가 아니어도 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그 점에서 오너 리스크가 오히려 더 클 수 있다는 반론도 충분히 성립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2010년대에 들어서서 전 세계 시장의 나눠 먹게 됩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전세계 시장을 반반씩 나눠 먹습니다.)

 

하이닉스의 SK 인수 이후

하이닉스 인수 이후 SK 는 이 바닥의 인력을 모조리 흡수합니다.

이 때 느낌이 삼성전자가 2000년대에 쓰던 방법과 비슷했는데, 이쪽 전공자들은 거의 다 쓸어가는 식이었습니다.

경력직도 많이 뽑았는데, 삼성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하이닉스로 이직도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 동일 업계(경쟁사)로의 이직을 제한하는 법이 있는 걸로 아는데, 뭐 알다시피 이렇게 저렇게 잘 회피해서 이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삼성 인사 담당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직원이 퇴사 의사를 밝혀도 굳이 붙잡지 않는 문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삼성에서 일할 사람은 많다"는 자신감이기도 하고,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이어온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 즉 "사업으로 나라에 보탬이 된다"는 마인드가 깔려 있기도 합니다.

잘 길러낸 인재가 나가서 한국 산업에 기여한다는 논리죠. 그래서, 이직을 쉽게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인드는 확실한 1위일 때나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2위와의 격차가 좁혀지는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인사 정책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1위 자리를 지키기 쉽지 않겠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삼성전자의 임금 파업 문제도 단순히 "직원들이 돈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핵심 인재 유출을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뱀다리 1. 필자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소액 주주입니다. 엄청나게 큰 금액을 투자한게 아니라서 딱히 더 엄청 많이 잘 되라고 쓴 글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래도 ... 어디든 잘 되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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